00.2015년 가족과 함께....

05.역사탐방과 산보_양동마을~오릉~포석정~삼릉~괘릉~분황사~소금강산

백두산타이거 2015. 2. 3. 13:37

☆ 경주역사탐방은 계속된다.☆

 

※ 일 시 : 2015.02.01

※ 누구랑 : 작은백두산(이수홍)과 함께.

※ 코 스 : 양동마을 ~ 오릉 ~ 포석정 ~ 삼릉 ~ 괘릉 ~ 분황사 ~ 소금강산

※ 개 

 ~ 어제 무리해서 놀아서 그런지 아침에 흔들어서 깨워도 날 잡아잡쇼 하고 잡니다. 마눌님은 내일이면 여행가신 부모님이 돌아오신다고 반찬가지 등등을 준비한다고, 둘이서 다녀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조카는 빼고 단 둘이서 가라고 합니다. 뭔 심보인지... 딸래미도 엄마 말을 잘듣고 그냥 갑니다. 하지만, 오후즈음부터는... 아무튼 이어지는 경주역사탐방 이야기 시작합니다.

 

~ 8시에 집에서 나서고 30분 즘 뒤에 양동마을 입구에 도착을 합니다.

 

~몇 년 전 올 때만해도 이렇게 잘 갖춰지지 않았었는데...,

 

~ 따님. 여기좀... 찰칵.

 

~ 너무 일찍와서 해설가 선생님들이 기다리라고 합니다. 10시까지.. 뭐하누? 일단 기념사진 찍고.

 

~ 양동마을 회관에 들어가봅니다.

 

~ 잘 갖춰져 있어서 여기만 봐도 대략적인 내용을 알 수 있겠더군요.

 

 

 

 

 

 

 

 

 

~ 잘 보이지 않으니 혹시 정보가 필요하신 분들을 위해서 링크를 걸어둡니다.

    양동마을 <<=관광코스 안내

 

~ 시간되어서 다시금 매표소 쪽으로 나옵니다. 예전에는 그냥 다녔는데... 참..

 

~ 여자 해설가분들이 계시네요... 그런데 우리는 여강이씨 집안의 어르신께서 직접...

 

~ 스템프는 필수...

 

~ 일제시대에 지어진 학교시설이지만, 근래에 양동마을의 알림과 여러가지 이유로 한옥형식으로 손을 보았다고 합니다.

 

~ 워낙 사진을 많이 찍어서 귀에 쏙쏙 들어오는 설명을 듣는 곳만.. 몇 컷...

  관가정 : 청백리로서 조선 중종(1469-1494)~중종(1506-1544)때 명신 우재(愚齎) 손중돈(孫仲暾, 1463-1529) 선생이

             손소공으로부터 분가하여 살던 집입니다.

 

       

~ 관가정에서 마을을 바라봅니다. 참 오래전에는 저기 건너편 부터 돌았는데..

 

~ 관가정 뒷편에 아궁이에.... 이건 뭡니까.. 너무들 하시네요.

 

~ 집 뒷편에 작은언덕과 아래의 골이 만나서 시원한 바람이 만들어지도록 설계되었다고 설명해주십니다.

 

~ 협문이라고 합니다. 조선시대 여인들이 드나들던 문.. 항상 조상신을 모시는 사당 근처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 수도없이 양동마을을 왔었는데.. 여기까지 와본건 저도 처음입니다.

 

~ 사람이 거주하는 곳들도 지붕들은 옛날 풍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무첨당 : 회재 이언적 선생의 부친인 이번(李蕃)공이 살던 집으로, 물봉골 남향받이 언덕에 자리한 여강 이씨들의 대종가를

            구성하고 있는 안채, 별당채, 사당채 중에서 별당건물이 무첨당입니다.

근래에는 제사를 지내는 곳을 쓰이고 있답니다. 제사지낸분들 이름이 적힌 것에 초헌관이 비었습니다.

자세한 건 해설사분들의 설명을 들으시길바랍니다. 불천이 제사를 향교에서 지낸다고 하던데 여기서 지냈나 봅니다.

 

~ 서백당으로 향합니다.

 

~ 이 소나무 유명하죠. 이병철 삼성회장이 이 나무를 사러 사람을 보낸 일화...

  이병철회장이 나무광이어서 이 나무를 그렇게 가지고 싶어했다고 합니다. 수차례 나무를 사려고 사람을 보냈으나 거절을 당했고, 마지막에는  "이 나무는 저희 조상께서 이곳에 오실 때 가지고 온 나무 입니다. 그 분이 돌아가신지 오래되어 지금은 저 나무가 저희 할아버님이신데, 돈으로 저희 할아버지를 사가시면 저희는 어떻게 조상님들을 뵈라는 건지요."말을 듣고 마음을 접었다고 합니다.

 

~ 서백당(서백당의 원래 이름은 서인백당입니다.)
안골 중심의 산중턱에 자리잡은 규모와 격식을 갖춘 대가옥으로 이 마을의 입향조라 불리는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

1433~1484)공이 성종 15년(1454년)에 지은 월성(月星) 손씨(孫氏)의 종가집입니다.

 서백당(書百堂) 또는 송첨이라 부르며, 서백당(書百堂)은 하루에 참을 인(認)자를 백번 쓴다는 뜻이며 근래에 와서 굳어진 당호(堂號)입니다.

 

옆에 흙벽이 보입니다. 회재(晦齎) 이언적(李彦迪) 선생이 태어난 곳이기도 한 이곳은 당시 이언적선생님의 모친이 계신 곳이어서 남녀유별의 조선시대 풍습에 따라서 담을 지어둔것입니다.

 

~ 설창산에서 내려오는 기운을 담아두기 위해서 적어둔 글자라고 합니다.

 

~ 이제 필 받았는지 질문을 연속으로 마구 던집니다.

 

 ~ 전기 시설도 한옥풍으로.. 1975년에 이곳에 전기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설명해주시는 해설사님께서 군대에서 휴가받아서 나왔더니 너무 밝아서 눈이 부신게 기억나신다고 하시네요.

 

 ~ 옛 하인이 살던 집입니다.

 

  우리나라의 하인과 미국의 하인은 개념이 다릅니다. 신분의 위아래는 엄연히 있지만, 착복하듯이 부리는 서양의 흑인하인과는 다릅니다.

 

우리나라는 먹고 살기 힘든 사람들에게 일정한 곡식과 잘자리를 마련해주고 주인의 농지를 경작하고 집을 손보는 일을 해주는 것이라고 설명을 해주십니다.

 

 ~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이 마을도 영향을 받은 것을 설명해주십니다.

   계단식으로 된 벽이 전통 우리나라 양식이지만.

 

~ 이렇게 일자형식의 벽은 일제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합니다.

 

 ~ 1시간반을 설명해주시고는 12시가 다되어서 설명을 마치십니다. 해설사분께서 거주하시는 집이라고 하네요. 워낙 잘듣고 물어보기도 하니까 본이 어디인지도 물어보시고 다음에 전화를 달라고 시면서 근무일이 아닌 날에 시간이 맞으면 전체적으로 설명을 해주신다고도 하십니다.

 

  이 외에 향교와 역사적인 설명을 듣기는 많이 들었지만, 그건 다음으로 미루고.. 서둘러서 오릉으로 가기로 합니다.

 

 ~ 저거 연을 심어두는 곳 같이 보입니다.

 

 ~ 자꾸 미련을 두면 가는 길이 느려지기에 할 수 없이 아쉬움을 뒤로하고 서둘러서 출발합니다.

    짜쓱.. 들어오면서 먹고 싶다는 유자차 사달라고 하니까.. 쩝...... 하나 사먹이고 갈게요....

 

 

 ~ 생각보다 오릉으로 오는데 얼마 걸리지 않네요. 오는길에 식사는 가다가

마음에 드는 식당에 들어가서 먹기로 했는데.. 걸린게 불고기 백반이네요.

 

 ~ 반찬도 푸짐하고 맛도 좋습니다. 이녀석 아까 유자차 안마셨으면 폭풍흡입했을것 같은데.. 좀 아쉽네요. 담엔 집사람고 함께 와보기로 합니다. 명합도 챙겼고요.

 

 ~ 이곳 입니다.

 

~ 식사 후에 차몰고 3분이면..오릉에 도착합니다. 주차하고 있으니까. 자전거타고 주차비 받으러 오시네요. 천원...입니다.

 

 ~ 그렇게 경주를 많이 다닌 저도 오릉은 처음 옵니다.

 

 ~ 전국박씨 문중의 제사를 여기서 지낸다고 합니다.

 

 

~ 표주박 모양의 저 곳은 틀림없이 두분이 누워계실텐데.. 열어볼수가 없으니..

 

 ~ 스템프 필수...

 

 ~ 해설가님과 다정히도 걷네요. 유자차를 마시면서..

 

 ~ 걸어오시면서도 계속 설명을 해 주십니다.

 

 ~  우측편에는 제를 지내기 위한 곳이라고 합니다.

 

 ~ 홍살문이라고 불리우며 왕과 신들 외에는 다닐 수가 없는 문이라고 합니다.

 

 

 ~ 1년에 한번 제를 지낼 때만 문을 열며 옛날 박정희 대통령시절에는 톨게이트부터 이곳까지 차가 밀려서 정신이 없었다고

   합니다. 들은건 참 많은데.. 글로 정리하려니까 너무나 길어질 듯해서 요까지만...

 

 ~ 이 곳도 역사가 담긴곳이죠. 요기까지 오릉에 대한 설명을 해주신 해설사님은 돌아가시고...

 

 ~ 우린 이곳으로 향해 봅니다.

 

 ~ 나정에 있는 우물도 이렇게 막았던데.. 예전 관람하셨던 분들의 무지함이과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다보니 우물을 치우고 할

    분이 안 계신 것도 있네요. 

 

 ~ 날씨가 춥다고 채비를 단디해서 보냈네요. 가방 딱 짊어지고.. 멋져용.

 

 ~ 오릉을 파노라마로 담아보고요.

 

 ~ 30년전에 지어진 건물도 구경갑니다.

 

~ 기념사진 찍고..

 

 ~ 오릉의 역사탐방을 마칩니다. 이제는 어디로?? 포석정으로...

  

~ 포석정에 도착합니다. 빠짐없이 날인하시고요...

 

 이 때 경주 남산 등산을 하러 오신분들이 숲길휴식기간이라서 통제된 구간때문에 술한잔 하신 냄새를 풍기면서 한탄을 하십니다.

해설사님이 난감해 하시기에.. 제가 간단히 설명을 해드렸더니... 조용히 가시네요^^; 산을 가는중에 통제구역이 많아서 난감하셨나봅니다.

 

산은 지금 우리가 못가는 것을 아쉬워 하시기 보다 우리가 양보해서 다음세대가 즐기게 해주는게 맞지 않아 생각합니다. 

 

 ~ 오후에 접어드니까 날씨가 풀립니다. 저는 매표소로.. 수홍이는 해설사님 기다리고..

 

 ~ 입구에서 해설가님을 기다리면서 한방 찰칵.

 

 ~ 이게 뭘까요? 우물... 입니다. 돌... 가벼워 보이는데 ... 들지마라고 합니다. 시도해서 성공한 사람이 없다고 하네요.

 

 ~ 포석정 설명을 시작하십니다.

 

 ~ 선수학습량이 많아서 그런지 제가 아는 것보다 많은것을 알고 있습니다.

    해설사님과 주거니 받거니 대화 하듯이 설명을 듣네요. 나중에 집에 와보니 해설사님의 설명이 담긴 책을 읽었더군요.

    구.백제 견훤이 신라의 왕을 이곳 포석정(포석사)에서 죽이고 정당화를 위해서 유흥을 즐기던 곳이라고 한 것이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역사... 딸래미는 이곳에서 호국제사를 지내던 신라의 왕이 견훤에게 죽은 것까지 알고 있었는데,

    왕건이 도우러 왔다가 공산전투에서 8명의 장수를 차례로 잃고 그 산이 팔공산이 된거를 하나 더 지식창고에 담아갑니다.

 

 ~ 이제 필 받아서 .. 신이 납니다.

갑자기 날 따뜻해졌다고 분신술 해본다고 합니다.

그냥 한번 해보고는 상황이 좋지 않아서... 다음으로 미룹니다.

 

~ 포석정에서 나와서... 마지막 찰칵.

 

~ 굳이 안가도 되는 삼릉을 들러보자고 합니다.

 

 ~ 선덕여왕 촬영지로 유명했죠.

 

 

~ 다 치아뿌고 달리기 해서 위에 댕겨와???? 라는 생각이 불현듯이 듭니다. 하지만.. 오늘은 참고....그냥 갑니다. 괘릉을 향해서.

 

 

 

 ~ 산에서 내려오시는 분들이 부럽습니다.

 

 ~ 삼릉 뒤로가서 사진찍고..

 

 ~ 어두워서 잘 안보이지 3명의 왕이 누워있는 곳입니다.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 등 박씨 3왕의 무덤이라 전하나 확실한 건 아니라고 합니다.

 

 

 ~ 이녀석 돌만쌓여있으면 하나씩 올리는 버릇이 있습니다. 아마도 동생 생각에 그런가봅니다.

  

~ 달리고 달려서 원성왕릉인 괘릉에 도착합니다.

 

 ~ 홀로 외로이 있는 왕... 많은 왕권쟁탈의 시기에 왕이 된...

 역사가 재미있어서.. 올려드립니다.

 

이름은 경신(敬信). 내물왕의 12대손으로 아버지는 일길찬 효양(孝讓)이며, 어머니는 계오부인 박씨(繼烏夫人朴氏:또는 知烏夫人朴氏)이다. 비(妃)는 김씨로 각간 신술(神述)의 딸이다. 아들 인겸(仁謙)·의영(義英)·예영(禮英)과 딸 대룡부인(大龍夫人)·소룡부인(小龍夫人)을 두었다. 780년(혜공왕 16) 김양상(金良相)과 함께 김지정(金志貞)의 난을 평정하고 혜공왕을 죽인 뒤, 김양상이 선덕왕으로 즉위하는 데 큰 공을 세워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그뒤 선덕왕이 자식 없이 죽자 김주원(金周元)과 왕위다툼을 하게 되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김주원의 집은 서울 북쪽 20리에 있었고 그때 마침 큰 비가 내려 알천의 물이 불어서 주원이 건너오지 못했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인군(人君)의 큰 자리는 본래 인모(人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폭우는 하늘이 혹시 주원을 내세우지 못하게 함이 아닌가? 지금 상대등 경신은 전왕의 동생으로 본래 덕망이 높고 인군의 자격이 있다"고 하여 만장일치로 그를 세워 왕위를 계승하게 하니 얼마 안 있어 비가 그치고 백성들이 모두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당시 김경신보다 서열이 높은 김주원이 왕위에 추대되었는데, 김경신이 복두를 벗고 흰 갓을 쓴 뒤 십이현금(十二絃琴)을 들고 천관사 우물 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꾸었고, 아찬 여삼(餘三)의 해몽을 따라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를 올렸더니 알천의 물이 불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는 설화가 전한다.

 

 ~ 멀리 풍력발전기가 보이네요.. 그럼 저기로 가면 좌로는 토함산 우로는 조항산이 있겠군요.

 

 ~ 오늘 마지막으로 찍을 스템프입니다.

 

 ~ 아빠꺼도 지가 찍어준다고 합니다.

 

  

 ~ 왕릉까지 가는데 좌우로 석물이 있네요.

 

 ~ 맨 앞쪽은 아랍권 사람의 형상이 있는것을 보니 그 신라 말기에도 아랍과 무역관계가 있지 않았나 라는 것이 보이고요.

    그 옆에는 칼을 든 석상입니다.

 

 ~ 그 설명을 자세하게 듣다보니 급 집중모두가 되네요.

 

 ~ 칼을 든 석상을 뒤에서 보니까 무관들의 복장인 비늘갑옷 모양이 보입니다.

 

 ~ 이번에는 사자모양의 석상이 동서남북을 지켜주는 맹수의 모습을 만든거라고합니다.

 

 ~ 설명에서 들은 두번의 일본인의 토굴흔적을 찾아가봅니다. 확연히 표시가 납니다.

 

 ~ 원성왕릉에서 마지막 사진을 찍고... 지난주에 미리 찍어둔 분황사로 향합니다.

 

갈길도 바쁜데.. 내일 부모님 모시러 가는데 더러븐 차로 갈수는 없으니... 세차 좀 하고... 하루종일 기름주유 불들어 온 차 끌고 다니다가 기름도 넣어주고....

  

~ 분황사 도착했는데... 해설사님이.. 4시반에 마지막 해설 마쳤다고 해주지 못한다고 합니다.

   한 주를 걸려서 그거 들으려고 달려온건데...

 

분황사란....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인 불국사(佛國寺)의 말사이다.

전불시대(前佛時代)의 가람터라고 전하는 칠처가람(七處伽藍) 중의 하나로서, 634년(선덕여왕 3)에 용궁(龍宮)의 북쪽에 건립

643년에 자장(慈藏)이 당나라로부터 대장경 일부와 불전(佛殿)을 장식하는 번(幡)·당(幢)·화개(花蓋) 등을 가지고 귀국하자

선덕여왕은 그를 분황사에 머무르게 한 뒤 많은 급여를 내리고 호위를 붙이는 등 대접을 극진히 하였다.

특히 원효(元曉)는 이 절에 머물면서 《화엄경소 華嚴經疏》·《금광명경소 金光明經疏》 등의 수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의 교학(敎學)이 이 절을 중심으로 하여 널리 퍼지게 됨에 따라 분황사는 법성종(法性宗)의 근본도량이 되었다.

또 원효가 죽은 뒤 아들 설총(薛聰)은 원효의 유해로 소상(塑像)을 만들어서 이 절에 안치하고 죽을 때까지 공경하고 사모하는 뜻을 다하였다. 하루는 설총이 옆쪽에서 절을 하자 소상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일연(一然)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는 원효의 소상이 남아 있었으며, 그때까지도 소상이 고개를 돌린 채로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이 절에는 솔거(率居)가 그린 관음보살상이 있었고, 좌전(左殿) 북쪽 벽에 있었던 천수대비(千手大悲) 그림은 영험이 있기로 유명하다.

경덕왕 때 한기리(漢岐里)에 사는 여자 희명(希明)의 아이가 다섯 살 때 갑자기 눈이 멀게 되었다. 희명은 아이를 안고 천수대비 앞에 나아가서 도천수대비가 禱千手大悲歌〉를 가르쳐 주고 노래를 부르면서 빌게 하였더니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755년(경덕왕 14)에는 약사여래입상을 만들어서 이 절에 봉안하였는데, 그 무게는 30만6700근이었고, 만든 사람은 본피부(本彼部)의 강고내말(强古乃末)이었다.

고려시대에는 평장사(平章事) 한문준(韓文俊)이 지은 원효의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가 건립되었다. 이 비는 1101년(숙종 6) 8월에 내린 숙종의 조서에 의해서 건립되었다. 숙종은 원효와 의상(義湘)이 동방의 성인인 데도 불구하고 비기(碑記)와 시호가 없어 그 덕이 크게 드러나지 않음을 애석히 여겨서 원효에게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와 함께 유사(有司)로 하여금 연고지에 비석을 세우게 한 것이다.

그 뒤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이 절은 크게 손상을 입었으며, 자세한 역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약사여래입상을 모신 보광전(普光殿)과 승당(僧堂)·종각(鍾閣) 등이 있으며, 문화재로는 국보 제30호인 분황사석탑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 화쟁국사비편,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인 석정(石井) 등이 있다.

이 중 석탑은 원래 9층이었으나 현재 3층만이 남아 있는 모전탑으로서,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이 탑을 반쯤 헐었다고 한다. 그 뒤 절의 승려들이 탑을 다시 쌓기 위하여 헐었더니 바둑알만한 작은 구슬이 출토되었는데, 그 구슬은 수정처럼 빛나고 투명하였으며 태양을 쪼여 솜을 가까이 대면 불길이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 이것을 백률사(栢栗寺)에 보관하였다.

화쟁국사비의 비편은 지금도 가끔씩 발견되고 있는데, 비신(碑身)을 받쳤던 비대(碑臺)는 절 근처에서 발견되어 김정희(金正喜)가 이를 확인하였다. 현재 비대에는 ‘此新羅和諍國師之碑蹟(차신라화쟁국사지비석)’이라고 쓴 김정희의 친필이 음각되어 있다. 또 탑 옆에 있는 석정은 삼룡변어정(三龍變魚井)이라고 불리는 신라시대의 우물로 틀의 외부는 8각, 내부는 원형인데, 이것은 불교의 팔정도와 원융(圓融)의 진리를 뜻한다.

이 우물에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는데 795년(원성왕 11)에 당나라의 사신이 이 용을 세 마리의 물고기로 변신시킨 뒤 잡아서 길을 떠났다. 하루 뒤에 두 여인이 원성왕 앞에 나타나서 사실을 아뢴 뒤 남편을 찾아줄 것을 호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당나라 사신을 쫓아가서 빼앗아다 우물에 놓아주고 다시 살게 하였는데, 그 뒤부터 삼룡변어정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석등·대석과 많은 초석들이 남아 있으며, 1974년의 발굴조사에서 금동보살입상과 귀면와(鬼面瓦), 신라 및 고려시대의 와당 등이 발견되었다.

 

~ 까이꺼 혹시나 싶어서 미리 선수학습을 해둔 제가 설명하죠... 모전석탑부터 둘러보고요.

 

~ 오기전에 과학에 관심이 많은 따님께 물어봤습니다. 석탑이 벽돌모양을 쌓아서 만든건데.. 사용된 돌이 뭘까? 알만한 돌종류는 다 나왔지만, "안산암"은 이야기 하지 않네요. 결모양의 화산석으로 건축용으로 사용된다고 간략하게 설명만해주고, 나머지는 역사이야기로 조잘조잘 해줬습니다.

 

 ~ 분황사 화쟁국사부.

 

 

 

~ 모전석탑에서 기념사진.

 

 ~ 함 더...

  

 ~ 스님들이 계시는 곳이니 조용하게...

 

 

 ~ 분황사 약사여래입상에 들어가서 인사드리고 가자고 합니다.  불전함에 넣을 돈이 모자라서 딸래미에게 동전을 주었더니 불전함이 비었는지 동전소리가 너무 요란하게 나서 순간 당황했습니다.  저는 만원짜리 하나를 하나 넣고 인사 드리고 나옵니다.

 

 

 ~ 지난주 석굴암에서 종을 못친것이 아쉬운지 쳐보고 싶다고 합니다. 수홍아 아빠 지감에 만원짜리 하나 남았다...

 

 ~ 다음번에 해설사에게 설명들으러 올 때 쳐보기로 하고..

 

 ~ 기념사진만..

 

 ~ 황룡사지 터로 들어가 봅니다.

 

  

 ~ 사진은 많이 찍었지만, 황룡사에 대한 설명이 없다는 것이 아쉽습니다. 제가 아는 만큼 대략설명은 해줬지만, 다음번에는 제가 공부 단디 해와서 단디 설명해줘야겠군요.  

 

 ~ 여기는 어딜까요? ㅋㅋ 모전석탑에서 나온 구슬하나가 모셔진 백률사로 향합니다. 오기전에 탈해왕릉을 들어야되는데...

   그건 나중에 아빠랑 정상적으로 산행을 할 때 들러지는 코스니까.. 미뤄두고...

 

 ~ 그런데 왜 백률사는 이렇게 산으로 올라갈까요?

 

 ~ 백률사로 그냥가면 재미가 없어서 테더링으로 트랭글을 켜둔 작은백두님에게 손쉽게 뱃지를 얻을 수있는 곳으로 데리고 갔다가 백률사로 내려오려고합니다.

 

 ~ 해도 지고 채비도 풀어서 그런지 볼이 발그스름하게.. 얼었네요. ^^

 

 ~ 마주보면서 찍잡니다.

 

 ~ 이곳이 소금강산 정상입니다.  요건 제발이고요.

 

 

~ 작은백두산님께서 삼각점에 발을 올리고 인증샷을 담았습니다.

 

 ~ 백률사로 내려오는 길은 무지 쉽습니다. 조금의 미끄러움을 조심하여야겠지만요.

 

~ 여기즈음에서 집사람 전화가 옵니다. 내려가서 전화하기로 하고...

 

 ~ 여기서 하산시 백스텝 기술을 가르쳐줍니다.

 

 ~ 아따 여기는 영험한 곳인가 봅니다. 합격하신분들이 대단하신분들이네요.

 

 ~ 어라 석조사면 불상 사진이 어디로 가버렸지?

 

 ~ 에어컴푸레셔 써보기는 지난번 서울 울트라대회말고는 오랜만이지?

 

 

 

 

 

 

 

 

 오늘 쬐매 걸었네요. 쭈욱 이어서 걸을수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다음에 이런코스는 자전거로 한번 가보자꾸나.

 

 

*** 후   기 ***

~ 이제 스템프 찍을 곳 한군데만 남았습니다. 불국사인데요.. 그만큼 자주가고 손쉽게 받을수 있었지만, 작년에 먹은 팥빙수가

  너무 좋아서 그거 먹을 수 있는 시기에 맞춰서 마지막 도장을 찍기로 합니다. 불국사에는 해설가가 있을까요? 참 한달여만에

여기저기 많은 곳을 다니면서 역사에 대한 지식을 조금은 올려줬으려나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가볼 곳도 많고 살펴볼 곳도 많은 것이 경주역사탐방이니.... 오늘 원성왕릉인 괘릉에서 김유신장군을 왕으로 추대한 왕의 묘를 물어보니 안동쪽 산에 있다고 하네요. 수홍이에게 아빠가 거기가 어딘지 찾아보고 너를 데리고 가마.. 라고 약속을 했으니.. 조만간에 안강 쪽 산을 다닐일이 있으니 그때 물어물어 찾아보기로 하는 숙제를 남기고 저는 오늘 하루를 마무리 합니다.

 

수홍이는 힘든데도 잘 다녀줬지만, 역시나 오후즈음에는 지루함이 있어서인지, 다음에는 무조건 동생데리고 온답니다. 짜쓱 진작에 데리고 가자고 했더니만.....

 

 아무튼 한동안 산보다는 교육에 중점을 두다보니 뱃살만 나오고... 다리근육도 줄고.. 다음주 부터는 다잡아서 산으로 .. 갑니다.

그런데... 담주는... 처가집 일로.. 논산에 갑니다... 간김에 주변 산 10여키로 코스 찾아서 댕겨와야겠네요